중고책 판매가 급증하고 있다...AI 때문일까?

판매대에 진열된 중고 서적

사진 출처, Getty Images

    • 기자, 필리파 웨인
    • 기자, 기술 전문기자
  • 게재 시간
  • 읽는 시간: 3 분

세계 중고책 시장에서 뭔가 수상한 일이 벌어지고 있다.

최근 몇 달 동안 독립 서점들은 이상한 구매 패턴을 목격하고 있다. 바로 중고 소설책이 한 번에 수십 권씩 멀리 떨어진 창고로 대량 배송되는 일이 잇따르고 있는 것.

영국 노섬벌랜드에 있는 중고서점 '바터 북스(Barter Books)'의 스튜어트 맨리는 평소 일주일에 2000~3000권 정도의 책을 판매한다. 그런데 최근 캐나다의 한 업체가 한 번에 대량 주문한 책의 규모가 평소 일주일 동안 판매하는 물량과 맞먹었다.

맨리는 "중고책 업계에서 30년 동안 일했지만 이런 일은 한 번도 본 적이 없다"고 말한다.

맨리만 겪은 일이 아니다. 최근 전 세계 여러 서적상들이 이와 비슷한 대량 주문을 경험했다고 말하고 있다.

이들은 판매한 책들이 최종적으로 어디로 향하는지 정확히 알지 못한다.

하지만 이 책들이 해외의 열성적인 독자들에게 팔리는 것이 아니라, 엄청난 양의 새로운 정보를 필요로 하는 다른 무언가, 즉 인공지능(AI)에 사용되는 것 아니냐는 의심이 나오고 있다.

책을 둘러싼 법정 공방

중고책 대량 구매가 AI의 폭발적인 성장과 관련돼 있다는 의혹은 미국의 한 법원 판결에서 출발한다.

지난해 미국의 한 판사는 이런 방식으로 구입한 책을 AI 소프트웨어 학습에 사용하는 것이 미국 저작권법 위반이 아니라고 판결했다.

이 판결은 작가 세 명이 AI 기업 앤트로픽을 상대로 제기한 소송에서 비롯됐다. 윌리엄 앨섭 판사는 판결문에서 앤트로픽의 책 활용 방식이 "매우 변형적인 이용(exceedingly transformative)"에 해당하기 때문에 미국 법에 따라 허용된다고 밝혔다.

지난달 법원 문서가 공개되면서 앤트로픽의 AI 챗봇 클로드를 학습시키는 과정에서 책들이 폐기되고 있다는 사실도 드러났다.

앤트로픽 대변인은 "클로드는 공개적으로 이용할 수 있는 웹 데이터와 상업적으로 구매한 데이터셋, 그리고 우리가 직접 생성한 데이터를 조합해 학습한다"고 밝혔다.

그러면서 AI 업계에서 책을 통해 AI를 학습시키는 방식이 널리 활용되고 있다고 주장했다.

대변인은 데이터를 확보하는 과정에서 "희귀본이나 고서본을 구매해 파기하지 않는다"고 덧붙였다.

그럼에도 어떤 책들은 폐기되고 있다는 사실은 우려를 낳고 있다.

런던 북부에서 '월든 북스(Walden Books)'를 운영하는 데이비드 토빈 역시 최근 이례적인 판매 부수를 기록했다.

그는 "어떤 면에서는 수년 동안 팔리지 않던 책들을 판매할 수 있어 매우 기쁘다"면서도 "결국 그 책들이 파괴된다면 안타까운 일일 것"이라고 했다.

'파괴적 스캐닝'

앤트로픽 소송 건과 관련해 공개된 법원 문서를 보면, 오래된 책을 AI 학습 데이터화 하는 프로젝트는 내부적으로 '프로젝트 파나마(Project Panama)'라는 이름으로 불렸다.

문서에는 회사가 "세상의 모든 책을 파괴적으로 스캔(destructively scan)"하는 것을 목표로 했다는 내용이 담겼다.

'파괴적 스캐닝'은 책을 특정 장소로 보내 산업적 규모로 디지털화하는 과정을 말한다.

책의 제본 부분을 제거해 모든 페이지를 빠르게 스캔한 뒤, 책의 잔해를 재활용하는 방식이다.

바터 북스의 맨리는 "프로젝트 파나마를 둘러싼 수수께끼가 많다"고 말했다.

"프로젝트명은 처음 들어보지만, 이런 프로젝트가 실제로 존재한다는 사실은 새롭지 않습니다. 서적상들 사이에서도 많은 논의가 오간 주제입니다."

그는 그동안 판매한 책들이 해당 프로젝트 또는 다른 AI 기업의 유사한 프로젝트에 활용된 것인지 알지 못한다.

하지만 최근의 판매 추이를 설명하기도 어렵다고 했다. 마치 책들이 "아무런 규칙이나 이유 없이" 무작위로 판매되는 것처럼 보인다는 것.

판매된 책은 잘 알려지지 않은 라틴어 문헌부터 미국 서부를 배경으로 한 카우보이 소설까지 다양했다.

전문가들은 이처럼 주제가 매우 다양한 점 역시 AI가 구매 주체일 가능성을 보여준다고 말한다. 흔하지 않고 희귀한 텍스트가 챗봇과 같은 생성형 AI 도구의 기반이 되는 대규모 언어 모델(LLM) 학습을 개선할 새로운 자료를 제공할 수 있기 때문이다.

옥스퍼드대에서 지식재산권을 연구하는 에밀리 허드슨 교수는 영국의 저작권법이 미국과 다르다고 설명한다.

그는 "영국에서는 이러한 모든 복제 행위, 즉 학습용 자료를 구축하고 실제로 학습을 진행하는 과정에 저작권자의 허가가 필요하다는 것이 출발점"이라고 말했다.

윤리적 우려

서적상들에게 이러한 현상은 일종의 딜레마가 되고 있다.

모든 책을 반드시 보존해야 하는 것은 아니라는 점을 인정하면서도, 책이 파괴된다는 생각 자체에 불편함을 느끼고 있기 때문이다.

에든버러의 서점 '맥노턴스(McNaughtan's)'를 운영하는 데렉 워커는 "최근에 100부만 출판된 학술서적이 있고 그중 75부가 도서관에 있다고 한다면, 시장에서는 매우 희귀한 책일 수 있지만 한 권이 파괴된다고 해서 큰 손실이라고 보기는 어려울 수도 있다"고 말했다.

"하지만 저희는, 예를 들면 18세기 판본 중 현존하는 것으로 알려진 유일한 사본인 책들을 소장하고 판매한 적도 있습니다. 그런 책이 오랜 세월 끝에 파괴를 목적으로 구매된다면 훨씬 더 심각한 문제가 될 겁니다."

그리고 맨리는 사람들이 더 이상 책장에 꽂아두길 원하지 않는 많은 책은 재활용하는 것이 좋은 해결책이라고 말한다. 특히 그 과정에서 거래량이 증가한다면 더욱 바람직하다는 것이다.

그는 "어떤 사람들은 책이 어디로 가는지, 그리고 파괴되는지에 대해 윤리적인 차원에서 우려할 수 있다"고 했다.

그러면서도 "하지만 이제 세상에는 '다빈치 코드'가 500만 권이나 필요하지는 않다"고 덧붙였다.

"인터넷에서 20년 동안 홍보했지만 한 번도 팔리지 않던 책들이 지금에서야 팔리고 있습니다."

오른쪽 끝에 검은색 정사각형과 직사각형이 픽셀 모양을 이루고 있는 녹색 홍보 배너. 배너에는 “Tech Decoded: 매주 월요일, 전 세계적으로 중요한 기술 뉴스를 여러분의 이메일로 받아보세요.”라는 문구가 적혀 있다.

이곳에서 'Tech Decoded' 뉴스레터를 구독하고 전 세계 최고의 기술 뉴스와 트렌드를 확인해 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