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운동가 글로리아 스타이넘은 어떻게 여러 세대 여성의 삶을 바꿨을까

글로리아 스타이넘이 손으로 턱을 괸 채 편한 자세로 소파에 앉아 카메라를 응시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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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자, 티파니 워트하이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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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2세 나이로 별세한 글로리아 스타이넘은 미국 여성운동을 상징하는 영향력 있는 인물이었다. 그는 활동 기간 다양한 역할을 맡으며 여러 세대 여성의 삶을 바꿨다.

그의 트레이드마크인 보잉 선글라스와 금발로 염색한 긴 머리는 1970년대 당시 스타이넘이 반항의 표현이라고 여겼던 모습이었다. 그는 여성의 평등을 위해 싸운 세계적으로 유명한 활동가였다.

그는 낙태 합법화와 동성결혼, 여성의 동등한 권리와 임금을 지지했고 사형제도와 여성 할례에 반대했다.

그의 활동은 남성과 여성 모두의 반발을 샀고, 저속하고 위협적인 괴롭힘도 뒤따랐다.

어린 시절

글로리아 스타이넘은 1934년 3월 25일 미국 오하이오주 톨레도에서 태어났다. 그의 어린 시절은 순탄치 않았다.

아버지 레오 스타이넘은 전국을 돌아다니는 외판원이었다. 스타이넘은 어머니 루스와 언니 수잔을 비롯한 가족과 함께 카라반에서 살며 전국을 떠돌았다.

스타이넘이 10살이었을 때 레오는 가족을 버리고 캘리포니아로 떠났다. 스타이넘은 오랫동안 정신질환을 앓으며 무서운 환각에 시달리던 어머니 루스를 돌봐야 했다.

이 때문에 스타이넘은 12세가 돼서야 학교에 정규적으로 다니기 시작했다.

1972년 민주당 전당대회에 참석한 글로리아 스타이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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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설명, 글로리아 스타이넘은 1972년 민주당 전당대회에 참석했다

스타이넘은 훗날 이미 아이를 한 명 키웠기 때문에 자녀를 갖고 싶었던 적이 없다고 말했다. 그 아이는 바로 자신의 어머니였다.

1950년대 후반 그는 연구 장학금을 받아 인도로 갔다. 그곳에서 2년간 다양한 일을 했으며, 마을 여성들이 정부 정책에 반대하는 비폭력 시위를 조직하도록 돕기도 했다. 이를 계기로 그는 풀뿌리 운동에 관심을 갖게 됐다.

스타이넘은 인도를 떠나 1960년대 초 뉴욕으로 이주해 프리랜서 작가로 경력을 시작했다. 당시 남성 중심의 언론사에서 여성 기자가 굵직한 기사를 맡기는 어려웠다.

전환점이 된 기사

스타이넘에게 큰 기회가 찾아온 것은 1963년이었다. 그는 플레이보이 버니걸 칵테일 웨이트리스로 위장 취업한 뒤 휴 헤프너가 세운 사업체의 추하고 성차별적인 실상을 폭로한 기사 '어느 버니걸의 이야기(A Bunny's Tale)'를 '쇼(Show)' 잡지에 기고했다.

그가 면접을 보러 도착하자 경비원은 "이리 와, 버니, 버니, 버니"라고 외쳤다.

쟁반을 들고 플레이보이 버니걸로 일하는 글로리아 스타이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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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설명, 플레이보이 버니걸로 위장 취업한 스타이넘의 취재는 여성 혐오와 착취가 만연한 세계를 드러냈다

스타이넘은 '마리'라는 가명을 사용했고 나이도 속였다. 실제로는 28세였지만 플레이보이 측에는 24세라고 말했다.

스타이넘은 버니걸들의 저임금을 받으며 일하는 실상과 높은 굽의 신발과 꽉 끼는 코르셋을 몇 시간씩 착용하면서 겪는 신체적 고통을 폭로했다.

이후 명성과 악명이 함께 따라왔지만, 그는 여전히 편집자들에게 진지한 언론인으로 인정받는 데 어려움을 겪었다.

플레이보이 폭로 기사 덕분에 뉴욕타임스와 뉴욕매거진의 일을 맡을 수 있었지만, 대개 여성용 스타킹이나 최신 헤어스타일에 관한 기사였다.

그는 2016년 뉴욕타임스에 "지금까지도 나를 싫어하는 사람들은 나를 깎아내리려고 전직 버니걸이라고 소개한다"며 "하지만 나는 그 여성들의 노동환경을 개선하기도 했다"고 말했다.

여성들의 저널리즘

이에 굴하지 않고 스타이넘은 1968년까지 뉴욕매거진에서 진보적인 사회 문제와 여성의 권리에 초점을 맞춘 칼럼니스트로 활동했다.

그의 기사 '흑인 권력 이후, 여성 해방(After Black Power, Women's Liberation)'은 스타이넘을 미국 전역에 알렸고, 그는 1970년대 미국 여성운동의 얼굴이 됐다.

스타이넘은 2011년 가디언의 레이철 쿡과의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저는 유일한 여성이었어요. 제가 낙태에 관한 기사를 쓴 뒤 그곳의 (남성) 친구들은 '저 미친 여자들과 엮이지 마. 진지하게 인정받으려고 열심히 노력했잖아'라고 말했죠."

그래서 그는 직접 나섰다.

스타이넘은 1972년 여성운동가들과 함께 '미즈(Ms.)' 매거진을 창간했다. 이는 여성에 의해 설립되고 운영된 최초의 정기간행물로, 주로 가사와 패션에 초점을 맞추던 기존 여성 잡지의 대안이 되는 것을 목표로 했다.

‘미즈(Ms.)’ 매거진 표지 앞에 서 있는 글로리아 스타이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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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설명, '미즈(Ms.)' 매거진은 새로운 길을 개척했고 창간 일주일 만에 매진됐다

주로 남성이었던 비평가들은 이 잡지를 곧바로 폄하했다. 뉴스 진행자 해리 리즈너는 이들이 "할 말이 바닥나기 전까지" 6개월 정도 갈 것으로 내다봤다.

창간호는 일주일 만에 매진됐고 구독자 2만6000명을 확보했다. 이 잡지는 지금도 발행되고 있다.

1978년 스타이넘은 '미즈' 매거진에서 가장 악명 높고 널리 읽힌 에세이 가운데 하나인 '남자도 월경을 한다면(If Men Could Menstruate)'을 썼다.

남성에게 월경 주기가 있다면 권력과 정치·경제 구조가 어떻게 달라졌을지를 풍자적으로 고찰한 이 글은 지금도 성 역할에 관한 논의에서 언급된다.

스타이넘은 경력 말년에 이르러 여러 상을 받은 작가가 됐다. 여러 권의 회고록과 마릴린 먼로의 전기를 비롯해, 자신의 유명한 어록을 모은 재치 있는 제목의 책 '진실은 당신을 자유롭게 할 것이다. 하지만 그 전에 당신을 열받게 할 것이다(The Truth Will Set You Free, But First It Will Piss You Off)' 등 수많은 책을 집필했다.

낙태권 운동가

스타이넘은 여전히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여성운동가 중 한 명으로 꼽혔지만, 사회운동에 나선 것은 비교적 늦은 30대였다.

1969년 여성들이 자신의 낙태 경험을 공유하던 낙태 인식 개선 집회에서 스타이넘은 자신이 임신을 중단했던 경험도 공개해 달라는 권유를 받았다. 그 일은 수년 전, 인도로 떠나기 직전인 22세 때 런던에서 있었다.

당시 영국에서는 여성의 정신적 또는 신체적 건강이 위험한 경우가 아니면 낙태가 불법이었다. 담당 의사는 스타이넘을 위해 큰 위험을 감수하며 이렇게 말했다.

"두 가지를 약속해야 합니다. 첫째, 누구에게도 내 이름을 말하지 마세요. 둘째, 당신이 인생에서 하고 싶은 일을 하세요."

거의 60년 뒤 스타이넘은 회고록 '길 위의 인생(My Life on the Road)'을 존 샤프 박사에게 헌정하면서 두 약속 중 하나를 어겼다.

그는 그 낙태 경험 공개 행사를 "전구에 불이 켜지는 듯한 순간"이었다고 표현했다. 당시 미국에 더 큰 여성 인권 운동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깨달은 순간이라고 말했다.

거의 하룻밤 사이 스타이넘은 낙태권 운동의 선봉장이 됐고, 이를 "재생산의 자유"라고 불렀다. 그가 만든 이 표현은 정치권이 해당 문제를 더 쉽게 논의할 수 있도록 했다는 평가를 받으며, 지금도 낙태 논쟁에서 사용되고 있다.

낙태권 행진에 참가한 많은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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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설명, 1989년 '여성의 생명을 위한 행진'에서 스타이넘과 함께한 수전 서랜던, 글로리아 올레드, 제시 잭슨, 제인 폰다

스타이넘은 행진을 조직했고 곧 시위에서 사람들을 끌어모으는 인물이 됐다. 다만 그는 훗날 수많은 사람 앞에서 연설하는 일이 "정말로 무서웠다"고 인정했다.

1970년 미 의회가 여성에게 남성과 동등한 권리를 보장하는 평등권 수정헌법(ERA)을 통과시키지 못하자, 스타이넘은 다른 여성운동 지도자들, 그리고 미국 전역의 여성 300여 명과 함께 전국여성정치회의를 공동 설립했다. 이 단체는 정치와 공적 생활의 모든 영역에 여성이 참여할 수 있도록 노력했다.

같은 해 그는 ERA와 관련한 상원 청문회에서 대부분 남성이었던 청중에게 이렇게 말했다.

"저는 공공 식당에서 서비스를 거부당했고, 공개 집회 장소에서 나가라는 명령을 받았으며, 아파트 임대도 거절당했습니다. 그때마다 분명하게 제시된 유일한 이유는 제가 여성이라는 것이었습니다."

제2세대 여성운동은 계속 힘을 얻었고, 스타이넘은 이를 대표하는 가장 유명한 인물 중 한 명이었다.

그는 동성결혼도 지지했지만, 1977년 트랜스젠더에 관해 쓴 에세이로 비판받았다. 그는 2013년 자신의 "오래된 에세이"에 담긴 표현들이 "당시 시대적 맥락과 문맥에서 벗어나" 해석됐다며 입장을 분명히 했다.

그는 기고문에서 "성별 전환을 한 사람들을 비롯한 트랜스젠더들은 실제적이고 진정한 삶을 살고 있다고 믿는다"며 "그 삶은 축하받아야지 의심받아서는 안 된다"고 썼다.

스타이넘은 1998년 뉴욕타임스에 쓴 에세이로도 비판받았다. 당시 대통령이었던 빌 클린턴과 인턴 모니카 르윈스키의 부적절한 관계가 알려진 뒤 클린턴을 두둔했기 때문이다. 당시 르윈스키는 22세였다.

스타이넘은 "의혹이 사실이라고 해도 대통령은 성희롱을 저지른 것이 아니다"라며 "그는 인생의 힘든 시기를 겪고 있던 한 지지자에게 저속하고 어리석고 무모하게 추파를 던진 혐의를 받고 있다"고 썼다.

2017년 그는 "지금이라면 같은 글을 쓰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너무 화려하다?

진보와 보수 양쪽의 비평가들은 스타이넘의 외모부터 동기까지 모든 것을 공격했다. 일부는 그가 너무 화려해서 진정한 여성운동가일 수 없다고 주장했고, 다른 이들은 외모 덕분에 성공했을 뿐이라고 말했다.

제2세대 여성운동을 촉발한 책으로 평가받는 '여성성의 신화(The Feminine Mystique)'의 저자 베티 프리댄은 스타이넘이 여성운동의 얼굴이 된 것을 못마땅해했다. 스타이넘이 '미즈'를 창간하자 "사익을 위해 여성운동을 이용한다"고 비난했다.

프리댄은 언론이 스타이넘을 "유명인으로 만들려 한다"고 분개하며 "그러나 누구도 그를 지도자로 착각해서는 안 된다"고 말했다.

내셔널 프레스 클럽에서 연설하는 글로리아 스타이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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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설명, 스타이넘이 갑작스럽게 제2세대 여성운동의 얼굴로 떠오르자 일부 활동가들은 분노했다

리처드 닉슨 미국 대통령은 비밀 대화 녹음에서 스타이넘을 두고 격앙된 비난을 쏟아냈다. 이에 스타이넘은 "리처드 닉슨이 나폴레옹 이후 성적으로 가장 불안정한 국가원수라는 견해도 있다"고 응수했다.

악명 높은 포르노 업자이자 '스크루(Screw)' 잡지 발행인인 앨 골드스타인은 스타이넘을 겨냥한 공격을 벌였다. 스타이넘의 전화번호를 구강 성행위를 제공한다는 가짜 광고 옆에 게재하기도 했다.

그는 스타이넘과 닮은 여성의 노골적인 사진을 잡지 중앙 펼침면에 싣고, '미즈' 매거진 사무실 건물 밖 가판대에 펼쳐 둔 채 전시했다. 스타이넘은 매일 그 사진을 봐야 했다.

나이가 들면서 이 정도로 심한 괴롭힘은 줄어들었다. 그러나 뉴욕에서 얼굴이 알려진 인물이었던 만큼 길거리에서 논쟁하려는 낯선 사람들에게 붙잡히는 일도 드물지 않았다. 때로는 이들이 적대적인 태도를 보이기도 했다.

하지만 스타이넘은 논쟁이 이어지는 것을 반겼다. 2020년 그는 캔슬 컬처가 사람들의 입을 막아 공개적인 논쟁을 약화시킨다는 내용의 공개서한에 서명한 각계 인사 중 한 명이었다.

그는 뉴욕타임스에 "대화를 중요하게 여긴다면 상대방을 없애려 하기보다는 인간적인 방식으로 설득하려고 노력해야 하지 않겠느냐"고 말했다.

'나는 우리에 갇혀 짝을 맺을 수 없다'

글로리아 스타이넘은 결혼에 관심이 없다는 뜻으로 "나는 우리에 갇혀 짝을 맺을 수 없다"고 농담한 적이 있다. 그러나 그는 부유하고 유명한 독신 남성 여러 명과 공개적으로 활발한 연애를 즐겼고, 비평가들은 이를 또 다른 공격의 빌미로 삼았다.

그중에는 포드 재단 대표를 지낸 프랭크 토머스와 영화감독 마이크 니컬스, 올림픽 10종 경기 선수 레이퍼 존슨이 있었다. 존슨은 1968년 로버트 F. 케네디를 암살한 남성을 제압하는 데 힘을 보탰다.

스타이넘은 "남성을 이용한다거나 지나치게 성적이라는 비난을 받는 쪽은 언제나 나였다"며 "한번은 누군가 '마침내 그녀는 홀로 잠들다'라고 적힌 묘비 만화를 내게 보내기도 했다"고 밝혔다.

그러나 스타이넘은 2000년, 66세의 나이로 남아프리카공화국 출신의 사업가이자 환경운동가이며 배우 크리스천 베일의 아버지인 데이비드 베일과 결혼했다.

당시 이 결혼은 일부 여성운동가들에게 놀라움과 실망마저 안겼다. 이들은 스타이넘이 결혼 관련 법을 둘러싸고 수년간 열띤 논쟁을 벌이는 모습을 지켜봐 왔다.

하지만 스타이넘은 관련 법이 마침내 바뀌었다고 말했다. 그는 수년 뒤 이렇게 설명했다.

"제가 결혼해야 한다고 여겨지던 때 결혼했다면 제 이름과 법적 거주지, 신용등급, 그리고 많은 시민권을 잃었을 겁니다. 이제는 그렇지 않아요. 평등한 결혼이 가능해졌습니다."

스타이넘은 베일의 미국 비자가 만료될 예정이었기 때문에 "그린카드를 위한 결혼"이었다고 털어놓기도 했다. 그러나 두 사람은 서로 사랑했고, 이와 관계없이 함께할 예정이었다고 말했다.

데이비드 베일, 글로리아 스타이넘, 모린 로스차일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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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설명, 모린 로스차일드와 함께 사진을 찍은 데이비드 베일과 글로리아 스타이넘

베일은 3년 뒤 뇌 림프종으로 사망했다.

스타이넘은 1986년 유방암 진단으로 건강상의 위기를 겪었고 유방 종양 절제술을 받았다.

'할 일이 너무 많아요'

글로리아 스타이넘은 "할 일이 너무 많다"는 이유로 100세까지 살고 싶다고 말한 적이 있다.

거의 한 세기에 이르는 생애 동안 그는 탭댄스에도 재능을 보였다.

2013년 버락 오바마 대통령은 스타이넘에게 미국 최고 민간 훈장인 대통령 자유 훈장을 수여했다. 오바마 대통령은 스타이넘의 활동 덕분에 더 많은 여성이 "마땅히 받아야 할 존중과 기회"를 얻게 됐다고 평가했다.

2024년 스타이넘은 90세가 됐다. 그는 뉴욕에서 혼자 살았으며, '미즈' 매거진이 여전히 발행되고 있다는 사실에 만족했다.

스타이넘은 BBC에 자신의 유산이 "개개인이 자신이 원하는 대로 더욱 고유하고 소중하며, 사랑받고 사랑받을 만한 사람이 되는 데 도움이 되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그는 당시 주류 언론이 전할 수 없었거나 전하려 하지 않았던 여성들의 목소리를 전한 인물로 기억될 것이다.

그리고, 그의 활동은 미국 여성 인권의 지형과 언어를 바꿔 놓았다.

글로리아 스타이넘의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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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설명, 글로리아 스타이넘은 현지시간 2일 향년 92세로 별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