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암살자(들)' 논란에 소환된 북한영화 '민족과 운명'…육영수 피격 어떻게 그렸나

북한 영화 '민족과 운명'에 등장하는 홍영자. 배우 오미란이 홍영자 역을 맡았다
사진 설명, 북한 영화 '민족과 운명'에 등장하는 홍영자. 배우 오미란이 홍영자 역을 맡았다
    • 기자, 리차드 김
    • 기자, BBC 코리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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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 전 대통령의 부인 육영수 여사 피격사건을 소재로 한 영화 '암살자(들)'이 역사 왜곡 논란에 휩싸이면서 북한 영화 한 편이 새삼 주목받고 있다.

바로 1990년대 북한이 만든 다부작 예술영화 '민족과 운명'이다.

정치권 안팎에서는 '암살자(들)'이 '민족과 운명'을 떠올리게 한다거나, 심지어 '리메이크 수준'이라는 주장까지 나왔다.

그렇다면 '민족과 운명'은 어떤 작품일까.

김정일이 만든 대형 프로젝트

1969년 김정일 당시 노동당 선전선동부 부부장이 예술영화 현장을 지켜보고 있다
사진 설명, 1969년 김정일 당시 노동당 선전선동부 부부장이 예술영화 현장을 지켜보고 있다

'민족과 운명'은 북한이 1990년대부터 제작한 장기 연작 영화로, 실제 인물과 사건을 대거 등장시켜 남북한의 현대사와 해외 교포사회를 북한 특유의 선전용 시각으로 그렸다.

이 영화의 기획은 1991년 5월 본격화됐다. 당시 김정일이 김일성 주석의 80회 생일을 앞두고 노래 '내 나라 제일로 좋아'를 토대로 다부작 예술영화를 만들라고 지시하면서다.

김정일은 일찍부터 영화에 각별한 관심을 보이며 북한 영화예술의 제작과 발전에 직접 관여했다.

김정일은 이 영화의 주제와 인물 설정, 음악 등 세부적인 제작 과정까지 챙긴 것으로 알려져 있다.

조선예술영화촬영소를 비롯한 북한 영화계의 주요 제작 역량이 투입됨에 따라 '민족과 운명'의 제작에 속도가 붙었다.

첫 작품은 김정일의 50회 생일을 앞둔 1992년 2월 공개됐다. 이어 김일성의 80회 생일이었던 같은 해 4월까지 초기 작품들이 잇따라 나왔다.

같은 해 북한 매체들은 이 작품을 국가적 문화사업으로 대대적으로 선전했다.

당초 10부작으로 기획됐지만 이후 20부작, 50부작으로 규모가 커졌고, 2002년에는 100부작 계획으로 확대됐다. 실제로는 2006년까지 모두 70부가 제작됐다.

최덕신·윤이상·최홍희…실존 인물이 주인공

북한 영화 ‘민족과 운명’에서 최현덕 역을 맡은 인민배우 최창수. 최현덕은 박정희 정부에서 외무부 장관을 지낸 뒤 북한으로 넘어간 최덕신을 모델로 한 인물이다
사진 설명, 북한 영화 '민족과 운명'에서 최현덕 역을 맡은 인민배우 최창수. 최현덕은 박정희 정부에서 외무부 장관을 지낸 뒤 북한으로 넘어간 최덕신을 모델로 한 인물이다

'민족과 운명'의 주인공들은 상당수가 실제 인물을 모델로 했다.

박정희 정부 외무부 장관 출신으로 훗날 월북한 최덕신을 모델로 한 '최현덕', 세계적인 작곡가 윤이상을 모델로 한 '윤상민', 국제태권도연맹 창설자 최홍희를 모델로 한 '차홍기'가 대표적이다.

이들은 해방 이후 남북한과 해외를 오가며 살아간 인물들이었다. 자연스럽게 영화 안에는 한국 정치뿐 아니라 서독과 프랑스, 일본, 미국, 캐나다의 교포사회 모습까지 담겼다.

이승만·박정희 대통령과 당시 보안사령관이던 전두환, 김재규 중앙정보부장, 김대중 전 총재 등 한국 정치사의 주요 인물들도 등장한다.

6·25전쟁 당시 북한군 종군기자로 남하했다가 체포돼 34년간 복역한 뒤 1993년 북한으로 송환된 비전향장기수 이인모와 북한 정치인 허정숙을 모델로 한 인물들도 나온다.

홍영자처럼 영화가 만들어낸 가상 인물도 등장한다. 홍영자는 박정희 정권과 중앙정보부 내부에서 벌어지는 사건들을 연결하는 주요 인물로 설정됐다. 이후 김형욱 전 중앙정보부장 실종과 10·26까지 이야기의 중심축 역할을 한다.

34년 전 북한영화가 그린 육영수 피격

북한 영화 ‘민족과 운명’ 제1편에서 문세광이 광복절 경축식장에서 권총을 발사하는 장면
사진 설명, 북한 영화 '민족과 운명' 제1편에서 문세광이 광복절 경축식장에서 권총을 발사하는 장면

1974년 육영수 여사 피격사건도 영화에 등장한다.

'민족과 운명' 1편 말미에는 1974년 8월 15일 서울 장충동 국립극장에서 벌어진 상황을 재현한 장면이 나온다.

영화 속에서 재일교포 문세광을 연상시키는 인물이 객석 사이로 뛰어나와 연설 중인 박정희 대통령을 향해 권총을 발사한다.

이어 혼란이 벌어진 사이 무대 뒤쪽에 숨어 있던 박 대통령의 경호원이 육영수 여사를 향해 총을 쏜다.

이 장면에서는 "자기 처를 제물로 바쳐 흔들리는 독재 정권을 유지한 살인 악마"라는 북한식 내레이션까지 흐른다.

이는 당시 한국 수사당국이 내린 결론과 정면으로 배치된다.

당시 특별수사본부는 재일교포 2세 문세광이 북한 및 조총련계의 지령과 지원을 받아 박정희 대통령을 저격하려다 육 여사가 총탄에 맞아 숨졌다고 발표했다.

문세광은 이후 법원에서 사형을 선고받았고, 1974년 12월 대법원에서 형이 확정됐다. 항소심 재판부도 북한과 조총련의 책동이 범행의 원천적 원인을 이뤘다는 취지로 판단했다.

미국 CIA 역시 1985년 작성한 내부 문건에서 이 사건을 '북한 공작원에 의한 박정희 대통령 암살 시도'로 기록했다. 문건은 박 대통령이 암살을 피했지만 육 여사가 숨졌다고 적었다.

반면 '민족과 운명'은 이 사건을 박정희 정권 내부의 정치적 음모로 재구성했다.

허진호 감독(왼쪽부터)과 배우 이민호, 박해일, 유해진이 지난 8월 10일 오전 서울 용산구 CGV 용산아이파크몰에서 열린 영화 '암살자(들)' 제작보고회에 참석한 모습
사진 설명, 허진호 감독(왼쪽부터)과 배우 이민호, 박해일, 유해진이 지난 8월 10일 오전 서울 용산구 CGV 용산아이파크몰에서 열린 영화 '암살자(들)' 제작보고회에 참석한 모습

이처럼 '민족과 운명'이 30여 년 전 육영수 여사 피격사건을 다룬 가운데, 최근 같은 사건을 소재로 한 허진호 감독의 '암살자(들)'이 개봉했다.

유해진이 사건 현장을 담당했던 형사를 연상시키는 인물을, 박해일과 이민호가 사건을 추적하는 언론인들을 맡았다.

영화는 문세광 이외에 다른 총격 가능성이 있었는지, 육 여사를 맞힌 총탄이 어디에서 날아왔는지 등을 등장인물들이 추적하는 방식으로 전개된다.

극 중 일부 인물들은 박정희 대통령 측이나 중앙정보부 등 당시 권력기관이 사건에 개입했을 가능성도 제기한다.

박정희 역으로 '인민배우' 된 김윤홍

북한 영화 '민족과 운명'에서 박정희 전 대통령을 묘사한 장면
사진 설명, 북한 영화 '민족과 운명'에서 박정희 전 대통령을 묘사한 장면

'민족과 운명'에서 박정희를 연기한 배우도 북한 주민들에게 강한 인상을 남겼다.

배우 김윤홍이다.

김윤홍은 재일동포 출신으로 북한으로 건너가 배우 생활을 했다. '민족과 운명' 시리즈에서는 박정희 역을 반복해서 맡았다.

북한 영화계는 그의 박정희 연기를 높이 평가했다.

당시 북한 매체는 김윤홍이 박정희의 표정과 외모뿐 아니라 북한이 규정한 '야심가·음모가'의 성격까지 표현했다고 선전했다.

김윤홍은 결국 '민족과 운명'에서 박정희를 연기한 공로로 북한 최고 수준의 배우에게 주어지는 '인민배우' 칭호를 받았다.

실존 한국 대통령을 북한 배우가 장기간 반복해서 연기한 것 자체가 당시로서는 이례적인 일이었다.

해외 풍경에 한 가요까지

1990년대 초 '민족과 운명'이 북한 주민들 사이에서 널리 알려진 데는 기존 북한 영화와 확연히 다른 영상과 음악도 한몫했다.

영화에는 서울의 도시 풍경은 물론 유럽의 거리와 파리 에펠탑, 일본의 번화가 등 해외를 배경으로 한 장면이 자주 등장했다.

외부 정보가 철저히 통제되는 북한 주민들에게 이런 장면들은 낯설고 신선할 수밖에 없었다.

'민족과 운명'은 결론적으로 북한 체제의 우월성을 강조했지만 화면 안에는 자본주의 국가의 자동차와 호텔, 도시 야경, 상점과 거리 풍경이 상당한 비중으로 등장했다.

특히 한국 노래도 영화에 등장했다. 심수봉의 '그때 그 사람'을 비롯해 '낙화유수', '홍도야 울지 마라' 등이 삽입됐다.

탈북민들의 증언에 따르면 당시 청소년들 사이에서는 기타를 치며 '그때 그 사람'을 따라 부르는 모습이 유행할 정도였다.

정보통신정책연구원의 북한 방송통신 이용실태 조사에 소개된 2021년 북한이탈주민 조사에서는 북한 거주 당시 가장 인기 있었다고 생각한 북한 프로그램으로 '민족과 운명'이 가장 먼저 꼽혔다.

제작된 지 30년이 넘었지만 '민족과 운명'은 여전히 북한 주민들에게 익숙한 작품으로 남아 있는 셈이다.

김형욱 실종에 10·26까지

북한 영화 ‘민족과 운명’에서 김형욱 전 중앙정보부장의 최후를 묘사한 장면
사진 설명, 북한 영화 '민족과 운명'에서 김형욱 전 중앙정보부장의 최후를 묘사한 장면

'민족과 운명'은 박정희 시대의 다른 정치적 사건들도 대거 담았다.

김형욱 전 중앙정보부장의 실종 사건도 등장한다. 영화에서는 김형욱이 프랑스에서 한국으로 끌려온 뒤 청와대 내부 밀실에 감금된다.

그리고 박정희가 직접 권총으로 김형욱을 사살한다.

이어 김재규가 벽에 있는 장치를 작동시키자 김형욱의 시신이 놓인 바닥이 열리면서 시신이 지하로 떨어지는 장면까지 나온다.

이는 실제 김형욱 실종사건의 수사 기록이나 확인된 역사와는 전혀 다른 허구다.

1979년 10월 26일 박정희 대통령 피살사건도 영화화됐다.

홍영자 편에서는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이 궁정동 안가에서 박정희 대통령을 향해 총을 쏘는 장면이 재현된다.

이 장면은 등장인물의 외모와 궁정동 만찬장의 구조, 사건 당시 알려진 상황까지 비교적 세밀하게 재현했다.

'암살자(들)' 역사왜곡 논란

국민의힘 구미시갑 도·시의원과 당원협의회원들이 28일 상모사곡동 박정희 생가앞에서 영화 '암살자들'에 대한 규탄 성명을 발표하고 있다

'암살자(들)'을 둘러싼 역사 왜곡 논란은 개봉 이후 정치권으로 번졌다.

개혁신당 싱크탱크 개혁연구원이 전국 성인 1017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조사에서는 응답자의 58.2%가 '암살자(들)'에 대해 '역사 왜곡'이라고 답했고, '창작의 자유'라는 응답은 27.6%였다.

국민의힘에서는 이 영화가 북한 영화 '민족과 운명'을 떠올리게 한다는 지적과 함께 '리메이크 수준'이라는 주장까지 나왔다. 영화 상영 중단과 불매운동, 허진호 감독의 국정감사 출석을 요구하는 목소리도 나왔다.

박정희대통령기념재단과 육영재단도 상영금지 가처분 신청을 포함한 법적 대응 방안을 검토하고 있다. 박정희대통령기념재단은 영화가 역사적 사실을 왜곡했다며 제작진의 사과와 상영 중단을 요구했다.

북한에서 '민족과 운명'을 봤다는 탈북민 출신 유튜버 한송이 씨도 두 작품을 비교했다. 한 씨는 '암살자(들)'을 관람한 뒤 북한에서 봤던 '민족과 운명'과 내용이 매우 비슷하게 느껴졌다고 말했다.

중국 자본을 둘러싼 의혹도 제기됐다. 주진우 국민의힘 의원은 중국계 금융사가 포함된 컨소시엄이 2023년 제작사 하이브미디어코프에 400억원 규모의 투자를 추진했다는 보도를 근거로 중국 자본과의 연관 가능성을 제기했다.

반면 제작사 측은 "영화의 제작과 투자 과정에 중국 자본이 유입된 사실은 전혀 없다"며 국내 자본으로 독립적으로 기획·제작한 작품이라고 했다.

제작진은 이번 논란에 대해 여러 기록과 자료를 토대로 실제 사건에 영화적 상상력을 더한 극영화라며, 특정 인물을 육영수 여사 피격사건의 배후로 규정하거나 영화 속 가설을 역사적 사실로 제시한 것은 아니라고 밝혔다.